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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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는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 국왕과 에든버러의 마리아 왕녀의 장녀로, 1894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와 결혼하여 그리스 왕비가 되었으나, 왕정 폐지로 인해 지위를 잃고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이후 루마니아에서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해외로 망명했으며, 1956년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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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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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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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엘리사베타 |
로마자 표기 | Elisavet |
그리스어 | Ελισάβετ |
칭호 | |
직함 | 그리스 왕비 |
재위 기간 | 1922년 9월 27일 – 1924년 3월 25일 |
개인 정보 | |
본명 | 엘리사베타 샤를로테 조세핀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
로마자 표기 | Elisabeth Charlotte Josephine Alexandra Victoria |
출생 | 1894년 10월 12일 |
출생지 | 루마니아 왕국, 시나이아, 펠레슈 성 |
사망 | 1956년 11월 14일 |
사망지 | 프랑스, 칸 |
매장지 |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지그마링겐, 헤딩겐 교회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요르요스 2세 (1921년 결혼, 1935년 이혼) |
가문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
아버지 | 페르디난드 1세 |
어머니 | 마리 |
2. 생애
1894년 10월 12일 루마니아 시나이아의 펠레슈성에서 페르디난트 1세와 에든버러의 마리아 왕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카롤 2세는 그의 오빠이고 유고슬라비아의 마리야, 루마니아의 일레아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1911년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아들이자 그리스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요르요스를 처음 만났다. 그리스와 루마니아가 발칸 전쟁에서 동맹 관계를 수립한 이후, 엘리사베트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부상병들을 위문했다. 1919년에는 여동생들, 어머니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1920년 12월 5일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 복위 여부 국민투표가 가결되면서 요르요스와 함께 그리스 왕실에 입성했다. 1921년 2월 27일 부쿠레슈티에서 요르요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922년 9월 27일 남편이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리스 왕비가 되었으나, 1924년 3월 25일 그리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왕비 지위가 박탈되어 루마니아로 귀국했다.
1935년 7월 6일 요르요스 2세와 이혼했고, 요르요스 2세는 1935년 11월 25일 그리스 국왕으로 복위했다. 엘리사베트는 루마니아에 계속 남아 있었고, 1947년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해외로 망명했다. 1956년 11월 14일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1894년 10월 12일 루마니아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에서 페르디난트 1세와 에든버러의 마리아 왕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엘리사베트를 '리사베타' 또는 '리찌'라고 불렀다.[40] 카롤 2세는 그의 오빠이고, 유고슬라비아의 마리야, 루마니아의 일레아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엘리사베트는 태어난 직후 부모와 떨어져 큰아버지인 카롤 1세와 왕비 엘리사베타에게서 자랐다.[41][42] 카롤 1세와 엘리자베트 여왕은 페르디난드 왕세자와 마리아 왕세자비가 너무 어리고, 자유분방하며, 경험이 없어 자녀들에게 제대로 된 왕실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사베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나, 오빠인 카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2. 2. 그리스 왕자와의 만남과 결혼
1911년 요르요스 왕자를 처음 만났다.[3] 발칸 전쟁 이후 그리스와 루마니아가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요르요스는 엘리사베트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엘리사베트는 "신이 그 왕자를 만들다 말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청혼을 거절했다.[3]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엘리사베트는 부상병들을 위문하며 병원을 방문하여 담배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4]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어머니, 여동생들과 함께 참석하여 남편감을 찾고자 했다. 1920년 초,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그리스 왕족을 만났을 때 요르요스 왕자는 다시 청혼했고, 엘리사베트는 이를 수락했다.

1921년 2월 27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요르요스와 결혼했다.[43] 결혼 직후, 오빠인 카롤 2세 왕세자는 요르요스 2세의 여동생 헬레네와 결혼했다.
2. 3. 그리스에서의 삶
1911년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요르요스는 엘리사베트를 처음 만났다. 그리스와 루마니아가 발칸 전쟁에서 동맹 관계를 수립한 이후, 엘리사베트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부상병들을 위문했다. 1919년에는 여동생인 유고슬라비아의 마리야, 루마니아의 일레아나, 어머니 에든버러의 마리아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가족들은 엘리사베트를 "리사베타(Lisabetha)" 또는 "리찌(Lizz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어린 시절 조부인 호엔촐레른 후작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지크마링겐에 있는 지크마링겐 주립 기록 보관소(Staatsarchiv Sigmaringende)에 보존되어 있다.
1920년 12월 5일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복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가결되면서 엘리사베트는 요르요스와 함께 그리스 왕실에 입성했다. 이후 엘리사베트는 왕세자비 시절과 그리스 왕비 시절을 보냈다. 1924년 3월 25일 그리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엘리사베트는 왕비 지위를 잃었고, 요르요스 2세 국왕과 함께 루마니아로 귀국했다.
2. 3. 1. 왕세자비 시절
1920년 12월 5일, 국민투표를 통해 그리스 왕가가 귀국하면서, 엘리사베트는 그리스 왕세자비가 되었다.[5] 1921년 2월 27일, 엘리사베트는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왕세자 게오르기오스와 결혼했다.[6]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10일, 엘리사베트의 오빠인 카롤 2세 왕세자는 게오르기오스의 여동생 헬레네 공주와 결혼했다.[7]결혼 후 몇 달 만에 엘리사베트는 임신했지만, 이즈미르 공식 시찰 중 유산했다. 이후 엘리사베트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엘리사베트는 남편 게오르기오스에게 열정을 느끼지 못했고, 그리스 왕족, 특히 시어머니 소피아 왕비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오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터키 전쟁 중에는 적십자 활동에 참여하여 부상병들을 위문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이후 엘리사베트는 장티푸스, 흉막염, 우울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2. 3. 2. 그리스 왕비 시절
1922년 9월 27일 남편 요르요스 2세가 그리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엘리사베트는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다.[6] 그러나 그리스-터키 전쟁의 패배와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실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엘리사베트는 아나톨리아에서 온 난민들을 위해 아테네 외곽에 판잣집을 짓는 등 구호 활동에 힘썼다.[14] 하지만, 왕족에 융화되기 어려웠고, 특히 소피아 왕비와의 관계는 어색했으며, 내성적인 성격은 오만함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결혼 후 몇 달 만에 임신했지만, 스미르나로 공식 여행을 가는 동안 유산하였고, 이로 인해 장티푸스, 흉막염, 주요 우울 장애를 겪으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1924년 3월 25일 그리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엘리사베트는 왕비 지위를 잃고, 남편과 함께 루마니아로 귀국하게 되었다.[6]
2. 4. 루마니아로의 귀환
1920년 12월 5일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복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가결되면서 엘리사베트는 요르요스와 함께 그리스 왕실에 입성했다. 1921년 2월 27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요르요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922년 9월 27일 남편이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1924년 3월 25일 그리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왕비 지위가 박탈되어 루마니아로 귀국했다.[23]2. 4. 1. 망명 생활과 이혼
1924년 3월 25일 그리스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엘리사베트는 남편 요르요스 2세와 함께 루마니아로 귀국했다.[23] 부부는 부쿠레슈티에 정착했다.루마니아에서 요르요스 2세와의 부부 관계는 악화되었다.[43] 엘리사베트는 도박과 외도에 빠졌고, 요르요스 2세는 주로 영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1935년 7월 6일 요르요스 2세와 이혼했다.[23]
2. 4. 2. 루마니아에서의 정치 활동
1927년 페르디난드 1세 국왕이 사망한 후 루마니아는 큰 불안정의 시기를 겪었다. 왕세자 카롤이 정부 막다 루페스쿠와 함께 살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그의 아들 미하이 1세가 섭정 위원회의 지휘 아래 국왕으로 즉위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상당 부분이 카롤의 권리를 지지했고, 그는 결국 1930년에 왕위를 차지했다.[1] 오빠와 매우 가까웠던 엘리사베트는 그의 루마니아 복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녀는 망명 기간 동안 매일 루마니아의 정치 생활에 대해 그에게 정보를 제공했다.[1]카롤 2세는 즉위 후 가족 구성원들과는 격동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정부를 유일하게 받아들인 왕족인 엘리사베스에게는 신뢰를 보였다.[1]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30] 그녀의 연인인 은행가 알렉산드루 스카나비의 재정적 조언, 오빠와의 좋은 관계 덕분에 공주는 루마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31] 1935년 3월, 그녀는 유고슬라비아 국경 근처의 바놀록에 있는 넓은 영지, 시나이아의 저택, 부쿠레슈티 쇼세아 키셀레프에 위치한 엘리사베타 궁전이라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우아한 별장을 매입했다.[31]
1938년 어머니인 마리아 왕비가 사망하고 1940년 카롤 2세가 폐위된 후, 엘리사베트는 루마니아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야심만만했던 공주는 다른 왕족들에게 독재적인 모습을 보이면서조차, 오빠의 정책을 따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32] 미하이 1세가 왕위에 복귀하고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의 독재가 수립된 후, 엘리사베트는 정치에서 물러났다.[32] 그러나 1944년부터 그녀는 루마니아 공산당과 관계를 맺고, 이제 그녀를 스파이로 여기는 조카를 공개적으로 음모했다.[33][34] 1947년 초, 그녀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원수를 반록 영지에서 맞아들였고, 그는 또 다른 조카인 젊은 페타르 2세 국왕을 폐위시켰다.[35][36]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루 스카나비를 통해 공주는 옛 형부이자 당시 파울 1세 국왕에 맞서 그리스에서 싸우는 게릴라 자금 지원에 참여했다.[32]
엘리사베트만이 공산주의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루마니아 왕족은 아니었다. 그녀의 여동생 일레나 역시 맏아들인 오스트리아 대공 슈테판을 왕위에 앉히려는 희망으로 그렇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두 공주는 당시 미하이 1세 국왕의 "붉은 고모"라는 별명을 얻었다.[37]
2. 5. 말년
1947년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엘리사베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44] 같은 해 12월 30일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선포 이후 강제로 나라를 떠나야 했다. 새로운 정권은 엘리사베트에게 짐을 챙길 사흘의 시간을 주었고, 엘리사베타 궁전은 약탈당했다. 하지만 망명하기 전에 반로크 영지에서 자신의 문서를 태울 시간은 가졌다. 1948년 1월 12일, 동생 일레아나와 함께 공산당이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루마니아를 떠났다. 스카나비 가족이 동행했지만, 두 공주는 국외 추방 이후 재산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45]
처음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정착했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 칸의 "빌라 로즈 알바"에 정착했다. 프랑스에서 마르크 파브라라는 젊고 잘생긴 유혹자이자 아마추어 예술가를 만났다. 그와 사랑에 빠진 엘리사베트는 결혼하고 싶어 사촌인 호엔촐레른의 프리드리히 공자에게 작위 수여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엘리사베트는 연인을 입양하기로 결정했고, 사망 3개월 전에 실제로 입양했다.[45]
1956년 11월 14일 칸 자택에서 사망했다.[45] 시신은 독일 지그마링겐의 "헤딩거 교회"인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묘지로 옮겨졌다.
3. 가계
레오폴트 공
카를 안톤 공
요제피네 공녀
안토니아 공주
페르디난드 2세
마리아 2세
마리아 공주
알프레트 공작
알베르트 공
빅토리아 여왕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아 공녀